그냥 쓴 건데, 꽤 마음에 들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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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고 해도 좋았다. 그가 실제로 얼마나 이름이 난 사람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그 때의 나는 특별한 확신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사막을 오가는 여행자 중 한 명으로서의 그에게서부터, 그런 험난한 여행이 한 인간에게 남긴 자취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보고 싶었던 것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단지 거리에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시선을 잡아 끈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던 것 뿐일 수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값싼 호기심을 끌만한 이국의 문화에 대한 것들 따위와는 달랐다. 그에게 이국이란, 즉, 다른 문화가 들어차 있는 공간이란 단지 그런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지평 이상의 것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공간에 문화가 설정되어 있다거나, 혹은 칠해져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문화에 대한 단순한 흥미를 넘어 그 문화가 그리고 있는 궤적, 그리고 그 궤적 위에 쌓여있는 것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사실 여행한다는 신분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는 그런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었다.
"그런가요?"
내가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여전히 여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는 그가 여행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구속 같은 것이 있다는 의미인 걸까, 그런 생각을 먼저 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제가 여행하는 것도 결국은 어디선가 정착하기 위해서지요. 어떻게 생각하실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언제나 포도를, 올리브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거라면 제가 조금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가 정확히 어떤 것을 상상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지만, 그 생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 간에 물질적인 조력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에게 대단한 선물을 제시하겠다, 그런 의도는 별로 없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제가 궁금한 건, 어째서 여행을 멈추고 정착하고 싶으신 건가,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럴 이유가 있다면, 지금까지는 어째서 여행을 지속해 오셨는가, 하는 것도 알고 싶네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목민은 정주민을 이길 수 없는 법입니다."
"이길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씀이시죠?"
"사실, 역사에서의 승리란 강력이 아니라 보다 미묘한 방식으로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의 풍화를 거쳐 살아남은 것이기 때문이죠. 즉, 시간의 풍화에 보다 잘 견디는 것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천히 진행되는 시간의 풍화에 무엇이 더 잘 견디고, 아니면 잘 견디지 못하는 가 하는 것은 눈에 잘 띄지 않지요. 그래서 미묘한 것입니다. 그 예 중 하나가 정주민들이 쌓아올리는, 그 문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모래바람이 잠깐 불고 지나갔고, 그는 머리를 감싼 스카프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그는 늘 흰색의 얇은 스카프로 머리를 두건처럼 감고 있었는데, 나는 그 스카프 아래로 흘러내리는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고보니 제가 만난 한 악마가 생각나는군요. 그 이야기를 지금 해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악마라뇨?"
갑자기 어울리지 않는 허황한 소리가 등장해서, 나는 약간 당황하기까지 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유치한 자찬이 될 것 같기는 합니다만, 아마 당신도 알고 계시겠죠. 전 지금까지 숱한 여행자들이 하는 것처럼 당신 앞에서 허풍을 떨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인간이기에, 제가 전하는 말들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고,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허풍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섞여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만 전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고, 또한 최대한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신에게 이런 제 말을 믿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늘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건 이성의 판단인 법이죠."
그는 손 끝으로 몸에 감긴 긴 천들을 매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제가 허풍을 가지고 이렇게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건, 제가 말한 악마라는 것이, 그런 것이나 혹은 전설처럼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제가 악마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을 만난 경험에 기반한 것이라는 것을 미리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닌 것 같지만, 요즈음에도 악마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하고 많습니다."
"물론, 그건 그럴 겁니다."
당연히, 대체로 종교가 있는 이들은 악마의 존재도 가정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말하는 악마란 대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는 종교가 가공이다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악마는, 보통 그들이 타락하는 것, 유혹에 빠지는 것, 죄악을 저지르는 것 따위의 근원을 찾아가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한 인간 자신의 심연 속에 그런 부덕한 것들의 씨앗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대상, 즉 악마가 그런 죄를 저지르도록 자신을 유도한 것이라는 변명이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모순이 있지 않습니까? 악마라는 존재가 실재한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는 말입니까?"
"아마, 악마들이 그런 악을 좋아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많은 생각을 하고 나서 떠올린 답은 아니었지만, 나는 악마를 믿는 많은 이들이 또한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 외에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이 있기는 할까?
그는 여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의 반대편에는 신이 있다고 해야겠죠? 그렇지만 신과 악마는 바로 반대편이라기에는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신은 인간에게 선을 행하라고, 혹은 어떤 것이 선이다, 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악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지 않죠. 다만 유혹할 뿐입니다. 물론, 이 악마라는 건 제가 실제 만난 악마가 아니라, 사람들이 믿는 악마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 그런 것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인간에게 선을 행하도록 명령하지, 유혹하지 않는 것은, 아니, 유혹할 수 없는 것은, 아마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선을 좋아하는 성향은 없거나 희박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굳이 인간과 유혹하는 자로서의 악마를 분리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오히려 유혹하는 자로서의 악마는, 그렇다면 인간 내부에 있는, 즉, 인간보다 하위의 어떤 존재라고 해야겠죠. 그렇다면 그런 악마를 두려워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것인데 말이죠."
"그건 그럴 것 같습니다."
약간 도약이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전반적인 의미 자체는 동의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 악마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악마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죠. 그렇지만, 전 진정한 의미의 악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는 인간 하부의 존재 따위가 아니었고, 오히려 인간과 동등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단지 악을 좋아한다 따위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죠."
그가 말했다.
"그래서, 전 그가 정말로 무서웠습니다. 물론 무섭다는 건, 단지 그가 절 당장에라도 해칠 것 같아서 그랬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그런 것에는 오히려 무관심해 보였으니까요. 그의 존재가, 악마로서 정말로 공포스러울 수 있었던 이유는 악마라는 존재 자체의 근저에 있었습니다."
나는 양녀처럼 자랐다. 사실, 나는 양녀와 사생아라는 단어 사이의 차이를 잘 구분할 수 없었다. 피가 섞였건 아니건 간에, 근본적으로 양녀도, 사생아도 타인의 자식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설령 피가 섞였던 것이라고 해도 사생아였던 나를 집안에 받아들인 것은 아버지의 관대함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나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들이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버리지 않고 데려와 키우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라는 식의 말들.
물론, 나는 굳이 집안까지 데려오지 않아도 괜찮았을 거라고, 아니, 어쩌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했다. 어쩌면 굳이 내가 이 집안에 들어와 있게 된 것은, 아버지가 특별히 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나를 이용해서 그가 그의 부인에 대해 일종의 권력 싸움 같은 것을 하려고 했던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너를 통하지 않고 가진 자식도 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건, 그런 목적이 있다면 나를 아주 괄시할 수는 없었다. 대충 자신의 부인의 자식들과 비슷한 대접을 해야, 내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버린 자식처럼 다루면서, 필요할때만 자기 자식이라고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테니까. 또 그런 이유 때문에, 그의 부인은 나를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그걸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건 그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실 그의 자식들이 나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하는 것은, 나는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자식들이 나를 아주 싫어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내게도 그 집안 속에서 발을 딛고 버틸만한 발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도 굳이 그의 부인, 혹은 여타의 나를 싫어하거나, 그럴 사람들을 자극하고 싶은 마음 또한 없었다. 그게 아버지의, 나를 가족의 다른 이들과 분리시켜야 한다는 필요와 맞물려 나는 나만의 방을 따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식사도 대체로 내 방 안에서 하인이 날라주는 것으로 해결했고, 어쩔 때는 그들에게서 얻은 식재료로 스스로 해결하기도 했다. 그 방 안에서 나는 대체로 안전했고, 나를 싫어하는 이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기에, 점점 더 그 방의 크기는 동시에 내 세계의 한계가 되어갔다. 나는 아버지가 부를 때라거나, 혹은 그의 명령으로 정기적으로 나들이늘 나가야 할 때까 아니면 그 방 밖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위인이었다면 나도 언제까지고 그런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죽음이 슬프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가 어쨌건 아버지이기에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내게 그에 대한 감정적인 고리, 혹은 공유하는 기억이나 관계 같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옆집의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보다도 차라리 더 담담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그다지 인식조차도 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그에 대한 반감을 깔아놓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의 죽음은 내게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내 세계였던 나의 방에서 더이상 머무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나를 싫어하는 이들을 어떻게 피해야 할 것인가, 장례식 기간 동안 나는 검은 베일을 쓴 채로도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장례식 절차를 다 밟으면, 어떻게 조용히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도중, 그가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아가씨는 이제부터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집의 하인이자, 늘 내 방에 식사를 날라다주기도 했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방에 찾아와서, 식사를 놓아둔 채로 조용히 그런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글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일단 이 집에서 빠져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이야기는 숨기기로 했다.
"도망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는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가씨도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가 있거든요. 물론, 다른 분들은 아가씨에게도 재산이 돌아가는걸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아가씨를 죽인다거나, 그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가 말했다.
"죽인다고요?"
반문하기는 했지만, 재산이 오간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오히려 나는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금 당장이라도 집 뒷문을 열어드릴테니 도망치세요. 조금 더 시일이 지난 후에, 이 집에서 자유로운 입장이 되면, 그때 다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일단 목숨부터 보전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죠."
"고마운 이야기지만, 이런 호의를 베푸시면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어쩌면 하인 주제에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전 예전부터 아가씨가 가엾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씨가, 머지 않아 의탁할 사람이 없는 처지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예감 같은 것이 들었으니까요. 저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걸 겪고 있는 사람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사실, 잘 모르겠다고 말했던 그 만큼이나 나도 그 순간에는 그의 말을 전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어쨌건, 나는 그날로 그가 모아두었었다는 돈을 받아들고 집에서 도망쳤다. 그 돈이 적은 액수는 아니었지만, 물론 앞으로 남은 한참 동안을 살아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집에서 나오자마자 살아갈 일이 막막하게만 닥쳐오기 시작했다.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이란 내 방에서 이것저것 주워 읽었던 책들에서 비롯한 것들 정도가 전부였다. 혹시 몸을 판다면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도 잠깐 진지하게 했다.
그렇지만, 살아갈 방법을 찾기 전에 일단 나에 대한 소문이 쉽게 번질 수 있는 이 도시부터 떠나야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나는 수중에 있는 돈으로 식량과 물을 구해 무작정, 다른 도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막을 지나다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아니, 정확히는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주위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발을 딛고 선 주위로 펼쳐진 풍경조차도 이내 의미를 잃고 당연히 있는, 무의미한 배경 정도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는건, 새하얗거나 혹은 새카만 하늘 밖에는 없다.
어쩌면 타인의 존재는 생각의 분량을 경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막에 나왔다고 특별히 생각이 더 많아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존재가 생각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라면, 나는 그때나 지금 이 순간에나 그런 타인을 곁에 두고 있지 않았기, 아니,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느 순간부턴가 그게 정말로 못했던 것인가, 하는 확신에도 균열이 번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실제의 나는 의지할 누군가를 처음부터 갖지 못하도록 설정된 것일 수도 있었고, 그러다보니 운명에 둔감한 한 인간으로써조차 내가 던져진 구덩이의 윤곽을 어렴풋 짐작할 수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니, 실제의 운명과 그 운명을 오히려 스스로 엮고 있는 나 사이의 차이는 점점 더 희미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구분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전 그를 한 인쇄소에서 만났습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런 책이나 주워 읽은 것 뿐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자체가 요즘에도 대단한 능력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거기서 교정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만한 보수는 받고 있는 것 같더군요."
"전 혹시 당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의심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하는 이야기를 보면 그 자신의 이야기는 아니겠다 싶었다. 물론, 그가 몇 마디 거짓을 섞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척 할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재밌군요."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만 가지고는 왜 그가 악마인지, 당신이 그를 어째서 그토록 무섭다고 말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그가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하인처럼 가엾다는 쪽으로 기우는데요. 지금 그가 있는 곳을 알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손을 써서 도와주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바로, 그 도와주고 싶다는 감정이 그를 정말로 두렵게 하는 겁니다."
그는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혹시, 지옥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보셨습니까?"
"저는 지옥을 믿지 않아서, 자세히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천국을 믿지 않는 것 만큼이나, 라고, 나는 그런 단서를 붙였다.
"지옥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가 악마를 직접 경험하고 나서 악마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게 된 것처럼, 저는 지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나서 지옥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지옥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지옥이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신이 없는 곳이죠."
"그렇다면, 당신은 신의 존재도 믿고 있습니까?"
"아뇨, 믿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그가 신이 없는 곳으로서의 지옥을 인정한다면, 과연 그 지옥은 어디 있는 것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의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지옥이란 특정한 공간이 아니고, 그 공간에 설정되는 개념도 아닙니다. 지옥이란 바로 여기에 있고, 우리가 이곳에 지옥을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벌이는 할 수 있었지만, 그 인쇄소 안에서도 나는 그다지 좋은 시선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나에 대해서 그리 많은 것을 알지도 못할 텐데, 그들에게서 자연스럽게 거리끼는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었다. 물론, 궁금했던 것 뿐이지 이제와서 그런 고독에 고통을 탓할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걸 가끔씩 자각할 때면, 머지 않아 의탁할 곳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는 하인의 말이 속삭임처럼. 그는 단지 내가 먹고 살 방법이 궁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말에는 보다 근원에 닿은 의미가 숨겨져 있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시일이 지나 내게 그럴 능력이 생긴다면, 돌아와 권리를 행사하도록 시도해보라고 이야기했지만, 생활에 파묻히는 동안 그 말은 간단히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내 그런 것들이 내게 어떤 의미를 형성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살아가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무미건조한 것들의 연속으로 구성된 것이었고, 그런 흐름 아래서는 사람들이 쉽사리 설정하는 가치있는 것들, 혹은 행복 따위마저도 사막의 메마른 모래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다.
하인의 말은, 실은 처음부터 나는 의탁할 곳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고, 고독이란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일 뿐이지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굳이 인간의 운명이 어떻다느니 하는 소리로 그런 생각을 넓혀갈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저는 그를, 악마를 만나고 나서 인간의 삶이란 근본적으로 지옥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로 그 깨달음의 저를 두렵게 했습니다. 그 깨달음은 본디 악마의 존재의 근원과 맥이 닿아 있는 것이니, 곧 그 악마가 두려웠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악마가 신이 사랑하는 자였던 존재가 신을 저버리고 타락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그 말이 사실의 측면에서는 큰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쨌건 그 이야기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악마란 신에게서 멀어진, 즉 신을 상실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악마의 존재의 근원은 악을 좋아해서 낄낄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신이 없는 상태, 바로 그것인 겁니다.
그래서 악마인 우리들 중 몇몇은 신을 갈구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악마를 마주하고 나서 신을 갈구한다는 것조차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말처럼, 신을 잃은 근원적인 고독은 외면해서 마비시킬 수 있는 것을 뿐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당신에게는, 그것이 그토록 두려운 것이었습니까?"
"당신은 아직 그것이 그리 두렵지 않은 모양이네요."
그가 말했다. 특별히 조소를 그 말 밑에 감춰두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 당신도 그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저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 공간에 궤적을 남기는 것, 예컨대 문화라거나 사람이라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습니다만, 실은, 저는 그 이전에, 우리가 공간에 궤적을 남기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옥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저는 그와 헤어지고 나서, 그가 나고 자랐다는 도시에 한 번 들렀습니다. 상속 문제로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던 이들이 어떻게 되었나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황을 살펴보고 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지만, 그게 그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도움이 있건 없건, 그에게는 이미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의미지요.
어쨌건, 그의 가족이었던 자들은 이미 몰락한 후였습니다. 그가 살았다는 저택은, 남아있기는 했지만 주인은 이미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습니다만,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소문으로 돌면서 그의 가족들은 그곳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재물 때문에 자신의 가족을 해쳤다는 말들 때문이었죠. 어쩌면 그의 아버지의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때, 희극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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